이휘소 박사 의 진실은?...
우리는 먼저 이휘소 박사라는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35년에 출생하여 경기고 2학년에 검정고시로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대학 2학년에 미국으로 유학해서 불과 25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천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이어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페르미 가속실험연구소(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로 유명한 곳.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던 엔리케 페르미의 이름을 땄음)의 이론물리학 부장과 시카고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970년대 초반에 ‘재미한국 과학기술자 협회’가 창립될 당시 발기인 중 한사람이었고 이후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1977년 6월 16일 그는 콜로라도 주의 연구정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의 I-80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숨졌다.
이휘소 박사는 60년대 후반 ‘카이랄 동력학의 재규격화 이론’을 연구해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국내 과학계 인사들은 이 박사가 살아있다면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지난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제라드 토프트 유트레히트대 교수는 한 때 이휘소 박사의 제자로 이 박사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어 게이지장에 이박사의 방법론을 적용, 박사학위논문을 썼다고 한다. 토프트 교수가 ’71년 발표한 박사논문이 너무 어려워 같은 분야의 물리학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이 박사가 이 논문을 보완, 재정리해 발표한 바 있다. 이제 한국이 낳은 세계적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가 베스트셀러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통해 그동안 어떻게 고국에서 왜곡, 날조되었는지 알아보자.
(1) 그의 전공은 핵물리학이 아니다
이휘소 박사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그의 전공이다. 아마도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원조인 엔리케 페르미를 기념하는 페르미 연구소에서 일했다는 것을 두고 그의 전공이 핵물리학이라고 단정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박사의 전공은 핵물리학이 아니다. 그의 전공은 ‘고에너지 소립자 이론물리학’이다.
필자를 포함해서 물리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핵물리학과 이론 물리학의 차이를 구분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박사의 수제자였던 고려대 물리학과 강주상 교수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은 둘을 엄격히 분리한다.
더욱 가소로운 일은 소설을 통해 마치 핵무기의 개발이 물리학자 개인의 손에 전적으로 달린 것인양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1964년 이래 이휘소 박사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국 브라운 대학의 강경식 교수는 1994년 <과학과 기술> 1월호에 ‘내가 아는 故 이휘소 박사’라는 특별기고를 통해
“핵개발이란 수백명의 핵공학자, 기술자, 실험물리학자가 함께 주어진 문제를 가지고 수억불 정도의 돈을 들인 시설과 실험설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설명은 오늘날 공개되어 알려진 문헌을 보고 미국의 유명대학에선 대학생들도 간혹 졸업논문 제목으로 쓸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 핵개발과는 거리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제3세계 국가로서 온갖 역경을 딛고 핵무기를 개발해낸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의 사례 가운데 물리학자 개인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있는가? 1998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실록 박정희 시대>에서도 박대통령 시대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휘소 박사는 핵무기 개발과 아무 관계가 없다”
라고 말한다.

(2) 우국충정의 일기와 박대통령의 서신은 없었다
소설 <무궁화꽃이…>에서 독자들의 심금을 가장 울린 것은 이휘소 박사(소설속 이름은 이용후)가 노벨상과 조국의 핵개발을 두고 고뇌하는 내용을 담은 일기문이다.
‘조국의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하는 게 조국을 지키는데 힘이 된다면…하늘이여,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가를 안내해 주소서…’를 위시하여 여러 문구가 있다.
이휘소 박사를 절세의 애국자로 존경하는 이들에게는 섭섭한 일이지만 위와 같은 일기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이 내용들은 1989년 작가 공석하氏(그는 이후 <소설 이휘소>를 쓰기도 했다)가 쓴 <핵물리학자 이휘소>에 처음 등장하는데, 모두 그의 창작의 산물일 뿐이다. 이후 이러한 조작들이 김진명氏의 <무궁화꽃이…>에도 그대로 개재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1994년 7월자 <신동아>紙에 실린 ‘인간 이휘소는 이렇게 날조되었다’라는 기사에서 공氏는 “1986년에 처음 이휘소 박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3년 후 통일교가 발간하는 월간지 <광장>에서 원고청탁을 받았다. 그 때 그동안 구상하던 것을 단 하루만에 써 넘겼다”라고 실토했다.
이어 그는 “루머가 있었고 이박사의 모친께 여쭤본 결과 그런 게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만하다고 생각되어 대강 이런 내용이라 상상하고 만들어냈다”라고 고백했다.
1977년 3~4월 두차례에 걸쳐 이 박사에게 전해졌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 내용은 어떠한가? ‘이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60만 대군이라도 동원하겠다’는 문구는 가히 압도적이어서 소설 <무궁화꽃이…>의 광고문구에서도 쓰였는데, 공氏는 이러한 부분조차 자신의 창작이었다고 인정했다. ‘60만 대군…’이라는 문구는 이동원 前 외무부장관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도 같은 내용이 있던 것이 기억하는데, 이휘소 박사에 대한 조작된 신화가 얼마나 팽배한지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이 박사와 박대통령은 상극
소설 <무궁화꽃이…>에 따르면 그는 유신체제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박대통령의 부름에 응했으며, 박대통령으로부터 유신 포기각서까지 받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휘소 박사가 핵개발의 비밀이 담긴 필름을 숨기기 위해 특수수술로 다리뼈에 묻혀서 가져오려 했으며, 그가 1977년 아깝게 숨지자 60일 만에 훈장이 추서된 것 역시 박대통령이 이 박사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재미동포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유신체제를 혐오하는 인물이었으며, 핵무기의 확산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를 아는 동료학자들의 일관된 견해다. 강경식 교수는 그의 기고문에서 “내가 그에게 재미한국 과학기술자 협회가 주선하는 모국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로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가 ‘그러한 정치상황에서의 한국방문은 권하지도 말아 달라’고 잘라 대답하여 무안당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라고 회고한 것에서 그가 박대통령과 유신체제에 강한 반감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박사는 1968년에 이미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를 유지했다.
소설 <무궁화꽃이…>가 한창 인기를 끌 당시 그가 정말 소설속 내용처럼 국립묘지에 안장된 줄 알고 참배를 온 이들이 간혹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지금 미국 땅에 묻혀있다. 그것도 ‘한국인 이휘소’가 아닌 ‘미국 시민 벤자민 리’로 말이다.
이휘소 박사가 24년 동안의 미국체류기간 동안 유일하게 고국을 방문한 것은 1974년 9월의 1개월에 불과하다. 그것도 박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국무성 산하 국제개발처(AID)의 서울대 자연과학계열의 대학원과정 육성프로그램을 위한 5백만달러 원조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1개월의 모국 체류기간 동안 그가 한 일은 조사업무와 국내 학자들 및 친척들을 만나고 서울대 교내신문과의 대담을 가진 일이 고작이다. 이러한 고국 방문조차 그의 유신혐오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은 미워도 고국의 발전은 도와야 한다”는 동료 학자들의 권유로 겨우 이루어진 것이었다.
공氏가 <핵물리학자 이휘소>에서 1977년 5월 15일 일본 동경에서 핵개발 필름을 숨기기 위해 특수수술을 받았다는 묘사조차 그야말로 창작의 산물이다. 그 시기에 이 박사는 동경에는 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진명氏는 1994년 3월 28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학 2학년 시절이었던 1977년 이 박사의 부고기사를 읽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물리학자가 다리뼈 속에 원자폭탄 설계도를 넣어 대통령에게 전했다’는 설이 떠돌기도 했다”라고 말해 이 묘사를 뒷받침하는 근거의 취약성을 자인한 셈이 되었다.
두 소설은 이 박사가 죽은지 불과 60일만에 훈장이 추서된 것을 그와 박대통령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지만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가 훈장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재미 한인과학자협회가 당시 한국물리학회 간사장이었던 조병하 박사(작고)와 논의했으며, 조 박사의 건의로 한국물리학회가 정부에 훈장추서를 건의한 것이다. 한때 정부는 이 박사가 한국 내에서 봉사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부정적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니 그의 훈장 추서는 어렵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점은 앞에서 두 차례 언급된 강경식 교수의 1994년 기고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또한 그 훈장은 3등급인 동백장이었다. 만일 박대통령이 60만 대군으로 경호하겠다고 할 정도로 아끼는 인물이었으면 1등급인 무궁화 훈장이나 최소한 모란장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 훈장조차 미망인 마리안느 여사가 “평소 유신체제를 반대해온 남편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독재정권이 제공하는 여행경비를 받으며 독재정권이 주는 훈장을 받지 않겠다”라고 거부했으며, 결국 이 박사의 老母가 받게 된 것이다.
4) 그의 죽음은 단순사고였다
이휘소 박사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의 실상은 이렇다. 그가 정규속도로 자동차를 운행하던 중 건너편으로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 견인트럭이 뒷부분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심을 잃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중앙분리지역을 넘어 그의 자동차와 충돌하는 바람에 숨진 것이다. 함께 탄 이 박사의 가족들은 모두 가벼운 사고만 입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말 어이없는 사고지만 그의 동료들은 “이런 사고는 미국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라고 애석해 할뿐이라고 한다.
그의 동료들과 유가족들은 지금도 그의 죽음이 단순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물리학자 이휘소>에서는 그의 죽음을 한국의 핵개발을 방해하려는 미국의 음모에 의한 것으로 묘사했으며, <무궁화꽃이…>에서는 그가 미국의 사주를 받은 한국 정보요원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무궁화꽃이…>의 김진명氏는 직접 미국으로 현장답사까지 다녀오며 그의 죽음이 의문사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다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보자.
의문사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더라구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욕심을 카터 미 대통령이 반대해 한·미관계가 악화된 상황도 포착됐구요. 이박사는 악화된 한·미관계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됐구나 싶었죠. 실제로 이박사의 사고는 그 지역에서 10년에 1번 날까 말까 한 사고였습니다. 제가 입수한 일리노이주 주립경찰의 사고보고서를 보면 이박사의 승용차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트레일러가 깊게 파인 중앙분리대를 넘어가 후미는 이박사의 차가 오던 도로의 1차선 끝에, 머리는 2차선의 바깥금을 넘어 갓길 끝에 정확히 닿아 멈춘 것으로 돼 있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도로를 완전히 막아버린 셈이죠. 이것이 단순한 사고라면 우연치고는 최악의 우연이 아닙니까?”그러나 그가 박대통령의 핵개발 프로젝트와 전혀 무관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앞에서 명백히 입증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한·미 관계의 악화와 연계시킬 여지가 없으며, 그의 죽음은 그야말로 운이 없었을 뿐이다.
마치 마른하늘에 친 번개에 맞아 사람이 죽는 일처럼 거의 가능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억지스럽게 의문사로 규정지으려는 그의 노력(?)이 애처로울 따름이다.
이 박사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묘사에 분개한 그의 유가족들은 <무궁화꽃이…>가 한창 인기를 끌던 1994년 9월에 소설이 고인의 명예를 회손했다고 하며 두 책의 저자인 공석하氏와 김진명氏 모두를 상대로 판금 가처분신청을 냈다.
비록 4년 후인 1998년 8월에 원고패소 판결이 내려졌으나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대한 소설 속의 묘사는 사실무근임이 판결을 통해 인정되었다.한 마디로 소설 <무궁화꽃이…>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물리학자’로 존경받아야 할 이휘소 박사를 ‘조국의 자주국방을 위해 영광을 버리고 귀국하려다 강대국의 음모로 희생된 절세의 애국자’로 엉뚱하게 왜곡했다. 강경식 교수를 포함해 그를 아는 학자들과 유가족들은 “책을 쓰기 전에 우리를 한 번이라도 만났어도 그런 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 “이 박사를 두 번 죽이는 짓”이라고 입을 모아 격분했다.
소설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책이나 광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이휘소 박사의 이름과 사진 및 일기(실은 픽션에 불과하지만)를 언급하고 있으며, 헌사조차 ‘이휘소 박사와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모든 분들께’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이 박사에 대해 이토록 왜곡을 일삼은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에필로그
두서없이 글을 쓰다보니 본의 아니게 길어지게 되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그동안 이휘소 박사에 대해 가졌던 신화가 무너진 것에 실망을 느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필자를 밸도 쓸개도 없는 한심한 사대주의자나 냉전논리에 가득찬 반통일분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요악
1. 이휘소박사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다.
2. 박정희와는 상극이었다
3.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4. 사실 이휘소박사는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도 비판적이었다.
현실과 픽션을 제발 구분하자.
김진명과 공석하의 소설을 보고 우리끼리 고인을 멋대로 영웅시하는 건 고인을 두번 죽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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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 2010/05/01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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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가요?
신화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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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aris @ 2011/08/1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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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에 교통사고난것을 생각해보고,,,, 사고 구상을 종합해본다면,,,, 트럭 트레일러 운전기사는,,,,,
스턴트맨급 트럭 트레일러 전문기사아닐까..... 정확한 목표물에 정확도를 보아서.....
미국 시민이되려면,,,,, 선서 내용으로 볼때,,,,, 미국시민으로 충성하는 국가관이 있는데,,,, 위반하는,,
시민권자들은 날날이 미국시민권자들 인데,,,,,,국가에 피해를주는짓은 시민권 자격이 없는것인데,,,
그래서 한국인들이 미국시민권을 가졌어도.... 행동 생활하는것을보면.... 미국시민 자격들이없다.....
총과 미국,,,, 미국 국가를 위하여 총을 잡은 경력에 시민권을 받아야,,,, 진짜 미국시민권이다,,,,
내용글을 읽어보면,,, 미국 국법을 어긴 이휘소박사,,,,,,, 미국에서 공부한것은 미국의 재산....
감히 국가학문을 빼돌리면 국법위반인............ 미국 빨갱이 백인들의 욕심 철학?....
CIA 및 각정보부처들은 왜있냐???????? 미국 안보를위하여 있는것인데,,,,,
더구나 핵문제 박사는 더더욱 조심하게 생활해야.....
내가 미국 국가안보국에 근무한다면..... 이휘소박사 하는짓은 당연히 못마땅하지,,,, 심리학전,,국가안보및
세계 안보를위한 대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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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갈매기 @ 2011/12/1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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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끝없이 확대재생산되는 이유는 "말" 지 1993년 11월호에 실린 박순희(고 이휘소박사의 어머니)여사와의 아래와 같은 인터뷰때문이죠.
-박대통령이 이박사의 아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이박사의 아들이 박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확인된 것입니다. 박대통령과 이박사 간에 직접 편지를 주고 받진 않았습니까?
"주고 받았지요"
-그 사실을 어머니께선 어떻게 알고 계신가요. 국가원수와 핵물리학자 간의 서신왕래는 극히 비밀스러웠을텐데요.?
"사고나기 1,2년전 이박사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 그가 박대통령에게 보낸 답신의 사본을 동봉했더군요. 편지지 2장으로 영어와 한글을 섞어 썼는데, 내용은 '지금은 아직 귀국할 단계가 아닙니다.'였지요. 나에게 '이 편지는 역사적인 것이니 어머니 혼자만 간직하시고 절대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사본을 아직 간직하고 계십니까?
"식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내 책상서랍에 깊이 넣어 두었는데 이사다니면서 분실해 버려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비밀이 탄로날 위험이 있을텐데 왜 이 박사가 어머니에게 사본을 보냈을까요?
"그인 나에게만은 뭐든지 알려줬으니까요."
-그렇다면 한국의 핵개발 문제와 관련한 언질도 있었습니까?
"내가 물리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딱히 그에 대해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한가지 알 수 없는 대목이....." (약간의 부연을 붙이자면 이휘소박사가 동경대학에 강의하러 갔을 때 박여사는 동경에서 아들을 만났다 한다. 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간 끝에 이박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러는 거예요.
'어머니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애국잡니다.' 그말이 내 기억속에 아직 또렷한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이가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줬는데, 내가 모르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왜 그 말이 무슨말인지 추궁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습니다."
-사고 나기전에 이박사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까?
"73년 동경에서 만날 즈음엔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내가 왜 가까운 곳까지 왔으면서 한국에 오지 않느냐고 했더니 '갈 사정이 못된다'면서 나더러 동경으로 오라더군요. 74년 서울에 왔을때에도 호텔에서 자지 않고 미 8군 영내의 미 대사관저에서 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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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그 집 앞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그동안.... 이 걸 올릴까 말까 많이도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애도 다 잊어버렸을 테고... 나 또한 잊어야 할 기억이기에... 그냥 올려 본다. 언젠가 쓴웃음이.....
만나지 말걸...... 처음부터 만나지 말걸 처음부터 사랑을 알려주지 말걸 그렇게 쉽게 져버릴 애라면.... .... 비가 오면 난 널 들을 수가 있어 눈이 오면 난 널 볼.....
Blue eyes crying in the rain sung by Heidi Hauge In the twilight glow I see her Blue eyes crying.....
나의 마음이 담긴 말들을 그동안 그냥 써두었는데 차마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한 미련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리움이 담긴, 추억이 담긴, 미련이 담긴 모든.....
함께 있었던 어느 날.... 침대에 드러누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그 친구를 보았다. 당황도 하고... 그 자리에 있는 내가 너무도 초라해...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