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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History

3.1운동에 대해 얼마나 아사나요 :: ‘개콘’ 장동혁, “국사가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이냐?”

3.1 절을 앞 둔 일요일 개그콘서트에 개그맨 장동혁 씨가 “국사가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이냐?” 며 교육실태에 관해 일침을 가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다 아시겠죠.

요즘 국사가 선택과목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기존의 고대사부터 현대사 이전까지의 필수 국사 과목과 선택 현대사 영역에서

이젠 고대사부터 현대사 이전까지 선택 가능하게 하려는 거 같네요.


제 생각엔 현대사를 필수로 하게 하고 고대사 이런 거 제주 빌레못 동굴, 봉산 지탑리,  평양 남경... 이런 게 정말 선택이 되야 하는 거 아닐지요.

벼를 발견한 게 현대사를 배우는 거보다 그렇게 정말 중요한 일인가... 솔직히 의문이 듭니다. 물론 국사학적으로 벼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하고 매우 매우 굉장한 일이지만 국사란 과목이 그저 역사적 사실에 나열에 관해 배우는 것만이 아니겠죠?

벤쿠버 올림픽에서의 선전으로 특히나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로(다른 선수들의 금메달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합디다. 종족의 영향 때문인지) 국가의 브랜드 가치가 많이 상승했다고 합니다.

높아진 브랜드 가치에 걸맞은 정신 똑바로 박힌 교육체계의 확립이 그놈에 경제발전보다 더 선행돼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다음은 3.1 운동의 원인, 경과, 영향에 대해 적어봤습니다. 이정도는 대충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지...않나요. 아닌가?





3 1일 운동

간접적이면서 직접적인 영향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으로 보기도 하나 더욱 영향을 끼친 것은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제창된 무오독립선언과 1919년 재일 청년들이 낭독한 2.8 독립선언서이다.

[민족자결주의 → 무오독립선언 →  2.8 독립선언 →  3.1 운동 → 중국의 5.4 운동, 동남아시아 독립운동]


한편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사망했는데 그 원인이 일제의 사주로 인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도시에 파다했고 그 이유 이전에도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헌병경찰제로 말미암아 일제를 향한 적대심은 최고조에 이르게 됐다.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이 3월 3일이 이었으므로 그 시기에 맞추어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으나 독립선언문이 발각됨에 따라 이틀 앞 선 3월 1일로 변경됐다.

3월 1일 오후 2시에 민족대표 33인이 중국집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으나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그것도 4명이 불참한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조용히 낭독하고 자진 신고, 경찰에 스스로 몸을 맡겼다.






한편 오후 2시에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이자 학생 대표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 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 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삼일 만세 운동은 앞서 말한 대로 종로에서 시작됐고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가장 유명한 사건은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이다.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거국적인 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작됐으나 차츰 폭력적으로 대응하였다.
일제 진압 과정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경기도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 향남면 제암리 (지금의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 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군인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기만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됐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한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 명조차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사실상 명칭만 변경된 것으로 경찰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