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만나지 말걸

검색 :
RSS 구독 : 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광주오적

2010. 5. 18. 14:33, 글쓴이 만나지 말걸

close
깨나 긴 글이지만 5.18을 맞이해서 그냥 한번 읽어보세요. 경희대 패륜녀 사건도 충격이고 스타크래프트 경기 조작과 관련.... 그 외에도 표면적으로 저런 사건에 의해 묻히긴 했지만 여러 일들이 일어나서 분위기가 뒤숭숭하네요..

요새 현대사 선택과목이라면서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날의 비참하고 어두웠던 분위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도 있겠군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또는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주의정부 수립,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군사정변을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9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일설에는 사상자와 실종자를 모두 합쳐 인명피해를 2천명 까지 잡기도 한다. 이 사건 때문에 광주를 비롯한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이후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점차 재평가가 가시화되었으며, 신군부·하나회 등을 해산하고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되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 ”이라고 규정했다. 1990 년대 이후 일부 극우 세력 등에서는 조선인민군의 개입설을 주장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부 극우 세력 등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 내지는 소요사태라는 신군부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일부 조선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발생한 대부분의 유혈사태가 단순한 계엄군-시민간의 충돌이 아니라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공작으로 발생한 계획적인 테러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언론에 의하여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되었다. 한편, 신군부와의 투쟁을 기층 민중이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중립적인 ‘광주 항쟁’, ‘광주 민중 항쟁’,‘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 ‘광주 학살’, ‘광주 학살사건’,‘5월 항쟁’ 등의 명칭도 존재한다. 한편 일부 보수 세력은 민주화운동임을 인정하지 않고 ‘광주사태’, ‘광주사건’, ‘광주폭동’ 등으로도 부른다.

* 발생 배경

1979 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으나, 그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 본부장 전두환(국군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1980 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내 정세 불안을 해소한다며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쿠데타 계획‘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 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하였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있었으나 스스로 해산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비상 계엄령을 내려 18일 1시 부로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하여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었고, 6백여 명의 학생, 교수, 민주인사 등이 체포되었다. 계엄령이 알려진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 폭력으로 진압했다. 공수부대는 학생들이 아닌 행인들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고등학생,일반인으로까지 확대됐다.

* 전개

1980 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새벽 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하여 감금하고 국회를 점령하여 기능을 마비시켰다.

자정 이후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고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이 도착한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18일 당일 아침, 비상계엄의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 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충정작전’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에 따라 주둔지 경비를 위해 일부 병력을 대학 구내에 남겨 놓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 반대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공수부대는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고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성격이 변한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고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하였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하였다. 20일 저녁에는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공수부대는 대검을 동원했고 진압은 가혹해졌으며 시위는 격렬하게 변하였다.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하였으나 무효였다.



21일 오전 전남도청 앞은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계엄군 역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애국가가 흘러나오면서 시민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되었다. 시민들은 속속 몰려들었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0일 밤 광주역, 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날 항쟁 기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 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망, 부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정부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발표했다. 광주 시민들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를, 언론이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영합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 오후,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스스로 시민군이라 부르며 계엄군에 대항한 자유 민주화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공수부대 배후가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시민들은 군수품 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 등 군수품, 방위산업체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자유 민주화 시민군은 전남도청 건물 안 계엄군 병력과 교전을 한 후 계엄군 병력이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 후에 21일 오후 18시경 시민군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명의로 유감성명서가 발표되었으나 신군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 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되었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하였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한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자유 민주화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에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기간을 해방광주라 부른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시민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하였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되었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 대부분 살해하였다.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7일 토요일

    * 오전: 대학생 100여 명,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
    * 오후: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 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 투입. 시위가담 대학생 외 일반시민까지 무차별 폭행
          o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o 23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o 24시 00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5월 18일 일요일

        *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 10시 15분: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첫 번째 부상자 발생)
        * 10시 20분: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
        * 11시 00분: 전남대 300여명 카톨릭센터 집결 경찰 최루탄발사하며 해산
        *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 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최초의 희생자).
        *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하였고, 3~4명이 한 조가 되어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를 외침.
        * 저녁: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짐.

5월 20일 화요일

        * 08시 00분: 광주 시내 고등학교 휴교 조치 발령.
        *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 20시 00분: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2개 탄통 박스)
        *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씨,김재화씨,이북일씨,김재수씨 사망, 수 십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망치와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 04시 30분: 광주KBS건물 방화
        *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 10시 19분: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
        *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 17시 30분: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18시 00분: 20사단 62연대가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하였다.
        *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 13시 20분: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 14시 20분: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하여 마을 청년 4명 처형.
        *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처
        *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 진입
        *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 광주 오적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당시 사건 발생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거론되는 인물 5명은 광주 5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
    * 정호용(당시 공수특전사령관)
    * 노태우(당시 수경사령관)
    * 박준병(당시 20사단장)
    * 이희성(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되었다. 검찰은 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하였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되었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5․18기념재단 등 5.18 관련 단체들의 피해 통계에 따르면 5.18 기간 동안 사망자가 165명, 행방불명자가 65명, 상이 후 사망자가 376명이다.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金大中內亂陰謀事件)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5.18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

*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하였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하여 재고되었다.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

노무현은 5.18민주화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되어 무참히 짓밟혔던 그 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

김영삼은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며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하였으나,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제6공화국이 출범된 후인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여,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자유 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되었으며 그 자격도 박탈되었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2007 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였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하였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한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

* 의의,교훈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1987년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 시민과 민중의 자치의 실현으로 민주주의적 능력을 입증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중의 시민의 높은 정치력과 도덕성,참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구현된 "절대공동체"적 경험의 공유는 이땅의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희망을 부여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열찬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를 알게해 주어 통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해방 후 줄곧 사실상의 군사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됨으로써,미국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없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면서 처음으로 반미운동이 싹트게 됐고,자주,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맨 위로

제목 : 여자와 남자의 본능 여자는 옷을 벗을수록 시선이 집중된다. 남자는 옷을 입을수록 시선이 집중된다. 여자가 짝사랑을 하면 보고도 못본 척한다. 남자가 짝사랑을 하면 목소.....

호감 있는 사람과 카톡을 주고받다 잘못된 맞춤법에 홀딱 깬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연인이라 생각했는데 사소한 맞춤법 실수에 괜스레(o) 괜시리(x) 실망하는 경우도.....

마음에 드는 남편 만드는 법 / 법륜스님 남편의 변화는 나를 낮추는 것부터 모든 번뇌는 자신이 일으킨 분별심 7년 전 신랑의 적극성에 끌려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날부터 남편은.....

이수의 '나는 가수다-시즌3' 강제 하차에 대한 뮤직앤뉴 공식 입장 MBC 측에서 일방적으로 보도한 엠씨더맥스 메인 보컬 이수의 '나는 가수다 시즌3(이하 나가수3)' 강제 하.....

괜찮은 사람인 듯합니다. 이런 사람 흔치 않아요....

사진 순서대로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은 카메라가없는 옵이이로 찍어서 화질이 똥이네요.^^ 1.보호필름을 스마트폰과 자리를 맞추시고 테이프를 플립커버처럼 옆에 붙여주세요. 2.....